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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등대 전경>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신지도, 곶리도, 말도, 횡경도, 방축도, 야미도 등이 별처럼 모여있다. 워낙 오밀조밀하게 군집하여 고군산군도는 ‘호수에 뜬 섬’들로 불리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송나라 사신들이 서해를 건너오면 고려군사들이 고군산까지 영접을 나왔다고 했다. 중국과 한반도가 뱃길로 연결되는 길목이었음은 물론이고 서남해안 쪽에서는 개경이나 한양으로 가는 중간 허리였다. 조운선·상선·병선이 상존했으며, 이순신도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등장한다.
사람과 배만 그러한가. 물고기에게도 필수코스였으니 칠산어장의 북단이 바로 고군산이다. 군도의 끝자락 말도에 1906년에 등대를설치하여 2007년으로 100년째 불을 밝히고 있으니 일찍이 서해항로의 요충지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숙명처럼 북상하는 조기같은 회유어종의 북상통로라 함은 역으로 남하하는 홍어·대구같은 찬물고기의 남하통로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군산수협조차도 애초에는 육지가 아니라 장자도에서 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군산진을 설치하고 서해를 경영하다가 결국은 왜구 등살에 옥구로 옮기게 된다. 워낙 노략질이 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황당선(荒唐船)의 ‘황당한’ 일도 자주 벌어졌다. 군산진만 육지로 떠난 것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에는 물고기들이 떠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황금어장 칠산이 고갈되면서 섬사람들은 서울·군산 같은 저자거리로 떠나갔다. 모진 세월은 이 천혜의 섬들을 가만두질 않았다. 새만금 간척이 본격화되자 공사용 차량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분진을 일으키더니 온갖 반대를 무릎쓰고 야미도·신시도가 방조제로 이어졌고, 이윽고 승용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군산 수천년 역사 속에 ‘단군 이래 최대’의 변화가 밀어닥친 것.
현재 군산쪽이 완전히 막힌 상태에서 남쪽 일부만 터놓은 상태인 바, 엄청난 압력으로 조류가 드나든다. 그래서 신시도 아래쪽 무녀도와 비안도 사이는 거대한 물골이 패였으며 어떤 어업도 불가하다. 무녀도의 어민들은 ‘그물 설치가 불가하고 양식은 커녕 조개채취도 어렵다’면서 ‘방조제 안쪽은 그래도 보상을 받았는데 바깥쪽은 단돈 천만원인가를 받았을 뿐이다’고 목이 메인다. 새만금 안쪽으로 산란하러 들어가는 길목인데 거대 장애물이 나타났으니 어업은 절단 난 셈이다.
말도는 고군산의 최북서단이다. 그래서 ‘맨 끝에 있는 섬’이란 뜻에서 말도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09년 11월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의 정략적인 목적에 의해 말도등대가 들어섰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침략하고 이후 조선을 경영해나가는데 등대가 급선무였다. 모든 자원과인력이 배를 통하여 오고가는 마당에 입출입이 곤란할 정도로 현지 해저 지형에 어두웠던 일본인들로서는 등대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다. 합방 직전에 여기 말도에까지 등대가 들어선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한반도 남부로부터 서해안을 거슬러온 배들이 말도등대에서 안내를 받고 거슬러 올라가서 태안반도 바깥의 격렬비열도 옹도등대에서 다시 안내를 받아 경기만으로 진입하는것이다. 섬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고 암초가 도사린 육지 가까이로는 배들이 위험해서 다닐 수 없으므로 수심이 깊은 원해로 항해하는 배들이 말도나 옹도 같은 외해의 섬에 설치된 등대를 의지하여인천항으로 접어들었다.
당초 등대는 백색의 8각형 콘크리트 구조에 내부는 주물로 만들어진 3단 나선형 사다리가 설치된형태였다. 20세기 초반에 콘크리트 건축물, 게다가 높다랗게 지은 콘크리트 건축물은 당시로서는매우 선진적인 건축양식이었다. 영국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등대 건축술을 받아들여 실험하였고, 이를 한반도에서도 광범위하게 실험하였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콘크리트 건축기술을 평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근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가장 선진적인 건축기술이 머나먼 섬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말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원래 세워졌던 등대는 오랜 세월 해풍에 부식되면서 제 역할을 다하고 1989년 10월에 백색의 원형콘크리트 구조물에게 역할을 넘겨주었다. 등대불빛이 발하는 말도의 등명기는 국내에서 개발한 프리즘을 쓰고 있다.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37키로미터 거리에서도 불빛을 볼 수 있어 서해안과 군산항을 오고가는 선박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있다.
말도는 섬은 작지만 해마다 5월경이면 바다갈매기들이 집단으로 군무를 추며 몰려들고 바위 속에단단히 뿌리를 내린 천년송이 어우러져 놀라운 풍광을 연출한다. 예전에는 이 말도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말도도 영락없는 낙도였다. 그러나 새만금 완공으로 말미암아 신시도와 야미도는 이미육지화되었고, 선유도·무녀도· 장자도 등 일부 섬은 다리로 연결되었다. 그래도 말도는 그 중에서 낙도에 속한다. 군산여객선터미널에서 1일 1회 장자도, 관리도, 방충도, 말도를 순회하는 여객선이 오고간다. 불과 1시간 50분이면 당도할 수 있으니 짧다면 짧고 멀다면 먼 곳이다.
말도 등대를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등대 자체가 깎아지른 해식 절벽 위에 서있다. 흡사 부여 낙화암에 뛰어들 듯 서있는 여인들처럼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러나 막상 등대에 가보면 아주 다부지게 서 있음을 알게 된다. 돌산으로 치솟은 말도의 정상부를 평평하게 다듬고 남산 위의 소나무처럼 의연한 기상을 품은 등대를 세웠다. 안타깝게도 구등대가 사라지고 신등대로 교체되어 흔적이라도남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등대의 꼭대기 등탑에 오르면 고군산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그 말썽 많던 새만금 방조제가 일직선으로 가로 지르고 있고 선유도, 신시도, 무녀도, 방축도 등 63개의 섬들이 군락을 이루며 점점이 흩어져있다. 등대에서 굽어보는 경관이란 이와 같이 뛰어난 것이다. 등대 높이만큼 거칠 것없는 곳에서 사방 경관이 두루 굽어보이기 때문에 등대의 불빛도 어느 섬에서도 관찰할 수 있고 배들도 이를 믿고 의지하여 달려가는 것이리라.
말도 등대의 등탑에서 망망대해에 그림처럼 흩어진 섬들을 굽어보면서 신현림시인의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란 시 한 편을 읽어본다. 바다를 묵묵히 바라보자면 자신이 바다를 닮아가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바다를 닮은 등대원들의 삶이 그러하지 않을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말도로 가는 배는 인근의 섬들도 들린다. 무엇보다 고군산에서 선유도는 반드시 들릴 일이다. 이들들은 예로부터 선유팔경이라 불렸거니와 섬들 간을 연결하는 다리를 이용하여 자전거 하이킹으로 둘러볼 수 있는 이점도 살릴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섬과 섬을 넘어가는 멋이야 말로 어떤 자전거여행에 비할 것이 아니다.

<무녀포구에서 바라본 선유도>
1970년대에 내무부에서 조사한 ‘도서지’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농가 13호, 어민 8호, 기타 5호로26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인구는 116명이었다. 말도초등학교에는 학생이 32명이 다니고 있었으니웬만한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섬들이 그렇듯이 말도에서도 젊은이들은 취업 등을 이유로 살 수가 없어 떠나는 섬이 되고 말았다. 현재 말도에는 15가구가 살고 있다.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순수 어업 이외에 낚시꾼에게 어선을 대여하고 민박을 치는 일로 먹고살고 있다. 말도는 고군산열도에서도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수심이 매우 깊고 평소에도 파도가 높다. 따라서 고기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객선의 결항이 많기 때문에 생활이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고군산은 예로부터 ‘신들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춤추는 무녀의 형상에서 따왔다는 무녀도란 섬 이름이 말해주듯 섬마다 신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말도에도 소나무와 팽나무가 빽빽한 숲속에 당집이 보존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단단하게 생긴 당집이 서 있는데 영신당(靈神堂)이라고부르고 있다. 해마다 한번씩 영신제를 올리고 있었는데 40여 년 전에 교회가 들어오면서 중단되었다. 말도에서의 당제는 풍어와 항해의 안전운항 등이 목적이었다.
선유도에도 당집이 전해온다. 선유도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망주봉이 기암괴석으로 솟아있는바, 사람들은 그 절경만 보고 돌아오지 오룡묘 신당이 좌정함을 미처 모른다. 다섯용을 모신 곳이니만큼 기와집이 화려한 폼새로 지워졌고 산신각도 별도로 세워져서 가히 신당의 위용을 자랑한다. 해마다 당제를 지내 지극정성으로 모셨음은 물론이고 수년에 한번씩 별신제를 올리게 되면 굿쟁이들이 몰려들어 삼현육각을 잡고 남사당패까지 쫓아와서 신명의 굿판으로 바다를 달구었던 서해안최대 신당의 하나였다.
신당 형체는 여전한데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지붕에는 나무들까지 자랄 정도로 쇠락했다.

<선유도 망주봉>
선유도는 장자도와 그대로 연결된다. 선유도에서 천천히 걸어가도 장자도에 닿는다. 다리로연육되어 쉽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장자도에도 어사대란 당집과 할머니바위가 남아있다.비승비속(非僧非俗)의 당할머니가 모셨던 신당이다. 건너편 횡경도에는 할아버지바위가 있어 양자간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고군산의12섬에서 모두 신당 및 당숲이 확인되지만 현행당제는 한군데도 없다. 당집이나마 문화유산으로 지정·보호하는 인식의 재전환이 필요하다.
고군산에는 사람들이 말로 들어온 초분(草墳)도 전해진다. 분묘를 쓰지 않고 짚으로 엮은 초분에안치함은 진도를 비롯한 남해안 전통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고군산에도 초분이 남아있어 그 전통이 남해안 뿐 아니라 서해안까지 분포되었음을 알려준다. 무녀도 초입에는 아예 궁금해 하는 외지인을 위하여 ‘관광용초분’까지 만들어 두었다. 무녀도에는 고군산 유일의 초분이 전해지고 있으니해마다 짚을 갈아주면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다.
이같이 신들의 고향이자, 초분같은 고풍스런 유산도 전해지며, 난초·모감주나무군락 등을 비롯한 자연유산의 보고인 고군산의 경관가치에 관해서는 아무런 계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관광객들은 선유도에 잠시 들려서 회를 먹고 해수욕장을 둘러보고 떠나간다. 연육된 무녀도나 장자도는 그관광객들이 떨어뜨리는 몇 푼의 동전의 혜택 조차에서도 제외된다. 같은 고군산에서도 ‘남북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선유도는 관광형 어촌으로 변신하면서 민심이 살벌해졌다. 멀리 떠 있는 말도같이 불과 15호 밖에 안 되는 섬에서도 어제까지 ‘형님아우’하던 섬 공동체가 각박하게 바뀌었다. 이웃섬에 서 조개를 캐가도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다. 대책없는 개발이 가져다주는 인간성 파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고군산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고군산의 옛스러움은 완벽하게 소멸하는 중이니 새만금 간척지가 가져다준 반갑지 않은 ‘보너스’이리라.
* 글.사진제공 : 지방자치단체, DMZ관광청, 인천관광공사